학생독립운동기념일 95주년
박정희가 폐지한 학생의 날 ‘국정 기념일’로 되살아 나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
11월 3일은 95주년을 맞는 ‘학생독립운동기념일’(학생의 날)이다. 학생의 날은 1929년 11월 3일, 일제강점기 조선 광주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던 대한민국의 기념일이다. 광복 후인 1953년 국정기념일로 지정됐으나 박정희 정권은 11월 3일 대신 11월 23일 ‘반공학생의 날’을 부각시키다 급기야 1973년에 학생의 날을 폐지했다. 11월 3일이 다시 국정기념일이 된 것은 그로부터 11년이 더 지난 1984년에서였다.
■ 폐지됐다 되살아 난 ‘학생독립운동기념일’
3·1운동과 6·10만세 그리고 광주학생의거는 우리나라 3대 독립운동으로 평가받는 뜻깊은 날이다. 3·1운동과 6·10만세운동 그리고 광주학생의거 외에도 1919년 2월 8일 일본 동경에서 재일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일제의 침략행위를 규탄하고 독립을 위하여 최후의 일인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한 2·8독립선언은 3·1운동의 발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날이기도 하다.
■ 광주학생운동의 ‘발단·경과·결과’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일본인 학생과 한국인 학생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일본인이 발행하던 신문에서는 불공정 보도를 하였고, 일본 경찰이 편파적으로 수사하면서 한국인 학생들에 대한 탄압을 가했다. 이에 비밀결사에 참여한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라남도 광주 지역의 학생들이 연대하여 대규모 거리 시위를 벌였다.
1929년 11월 3일 일본의 메이지 왕의 탄생일 기념식에 참석하였던 한국인 학생들은 기념식이 끝나자 불공정 보도를 한 일본인이 발행하던 신문사를 습격하고,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어 학생들은 학생투쟁지도본부를 결성하고, 11월 12일 장날을 이용하여 '구속 학생 탈환', '경찰의 교내 침입 반대', '한국인 본위의 교육 제도 시행', '언론·출판·집회의 자유' 등을 주장하면서 운동을 전개해 갔다.
광주에서 학생운동 소식을 들은 서울의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은 전국의 청년 단체, 학생 단체와 연락하여 전국 각지에서 학생들이 항일운동을 펼치게 하였다. 1929년 12월에는 전국 주요 도시에서 학생운동이 진행되었으며, 1930년 1월 중순부터 도시 지역뿐만 아니라 읍·면 단위 지역 학교까지 확산되었다. 투쟁의 형태도 시험 거부, 백지 동맹, 동맹 휴학, 격문 살포, 교내 시위, 거리 시위 등으로 다양해졌다.
광주학생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1930년 3월 말까지 진행되었다. 전국 194개 학교에서 5만 4000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하였다. 일제의 강력한 탄압과 조치로 구속 1642명, 퇴학 582명, 무기정학은 2330명이 받기도 했다. 3.1운동 이후 일어난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항일 학생운동이 시작된 곳이어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 1953년에 처음 국가기념일로 제정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은 학생의 날이라는 명칭으로 1953년에 처음 국가기념일로 제정된 것으로 처음 등장했다. 하지만 10월 유신 시대에 학생들의 민주화 투쟁이 계속됨에 따라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의거 1973년 3월 30일에 폐지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이후 이날을 기억하던 사람들에 의해 부활 운동이 일어나 1982년 9월 14일 ‘학생독립운동 기념일 제정에 관한 건의안’이 국회에 상정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노력 덕에 1984년 9월 22일 국무회의는 학생 독립운동기념일을 ‘학생의 날‘로 부활시켰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기 시작했고 사회 분위기가 변모됐었던 1990년에는 의미조차 퇴색되는 등 험난한 시기를 겪었다. 그래서 이 상황을 극복하고 독립운동의 정신을 기리고 기억할 수 있도록 2006년 2월 9일 국회에서 학생의 날을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이라는 명칭으로 변경해 이를 의결해 현재의 상태로 이어져 오고 있다.
■ 잊혀져 가는 학생의 날
90년대 X세대들은 기성세대에 저항하며 "요즘 것들은 버릇이 없다"고들 한다. 하지만 민주화의 물결로 요동치던 시위의 중심에는 언제나 대학생이 있었다. 각종 사회 변화 속에서 대학생들은 자신을 둘러싼 문제를 바로잡고자 교정과 길거리로 나와 시민들과 함께 섰다. 그러나 뜨거웠던 ‘학생운동’은 이제 옛이야기가 됐다. 역사가 된 피 끓는 투쟁과 숭고한 정신은 빛바랜 유물로 남았다.
일제강점기의 광주학생항일운동은 물론이고 3·1 운동, 6·10 만세운동 등이 학생들에 의해 점화되었고 투쟁과 파급 과정에 있어서도 학생들이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후로 전개된 ‘브나로드 운동’을 통하여 농촌 계몽에 주도적인 활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4·19 혁명, 6·3 항쟁, 부마민주항쟁, 6월 항쟁 등에 이르기까지 학생들은 정치인을 고무·격려하는 역할을 했고, 집권층에 대해서는 가장 커다란 압력단체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런 학생들이 어쩌다 ‘철없는 아이들’로 내몰리게 됐을까? 자유당 정권이 장기집권을 위해 정・부통령 선거를 조작하자 선거 결과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며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4·19 혁명'을 비롯해 1964~65년간 거세게 전개되었던 한일회담 반대투쟁, 1964년 6·3항쟁, 4·19의 도화선이 된 부마항쟁, 1960년 4·19 혁명,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 등 각종 민주화운동은 학생들이 주도했다.
유치원 시절부터 학원으로 내몰린 아이들... 일류대학이 교육 목표가 되어 학원이나 선행학습에 내몰려 대학 졸업 후에도 취업준비로 학원을 떠나지 못하는데 학생들이 ‘철없는 아이들’이 철이 될 수 있겠는가. 지식을 암기시켜 사람의 가치까지 한 줄로 세우는 교육으로 모순된 현실을 보고 분노하는 저항의식, 민주의식, 비판의식이 있는 사람으로 어떻게 길러낼 수 있겠는가. 입시교육은 폐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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