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랄랄라라라 필리핀 배낭여행 ]

THE GIRL, COMES FROM FAIRY TALE

 

 

그녀가 원하던 전망과 고난의 언덕

건강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한국인답게 숙소 문 앞 입구에 벗어놓고 들어온 그녀의 운동화가 밤새 내린 비에 쫄딱 젖었다

나는 신발이 두 켤레였기 때문에, 내 슬리퍼를 그녀에게 내줬고 그녀는 미안해하면서도 별다른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내 슬리퍼를 받아 신었다

 

그리고 그녀는 신발이 바뀌어서인가, 오늘부터 놀라운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곳에 온 뒤로 운동화에 양말을 꼭꼭 신고 발을 감싸고 다니던 내내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내가 알던 그녀가, 양말을 벗어던지고 발가락 사이의 바람을 느끼자마자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자신감이 차고 표정이 밝아지더니 주도적으로 변했다

 

갑자기 앞장서서 가격을 흥정하고, 지도를 보여주고 소통을 시작한다

먼저받은 필리핀사람의 번호로 전화를 하겠다고 나서더니 리스닝만으로는 쉽지 않다고 시원하고 털털하게 웃어대는 그녀가 낯설고 반갑게 느껴진다

 

 

 

그런 그녀의 변화가 좋아서

나는 내가 하려던 길찾기나 커뮤니케이션 같은 것들 앞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대화하는 동안 나는 그녀의 얼굴아래로 떨어지는 햇살과 평소보다 올라간 광대뼈에 맺힌 빛을 바라보면서 평소에 그녀를 잘 묶어두고 있던 고삐가 어느 정도 풀렸음을 직감했다

 

오늘은 움직임이 많은날이었고, 날씨가 평소보다 고르지 않은 날이었다

평소엔 모든것이 어느 정도 짜여있는데, 오늘만큼은 상황을 지켜보고 판단하자고 미룰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는 날이었다

 

그럼에도 어느날보다 훌륭했던 그녀의 텐션은 점점 커지고 단단해지더니 모든 순간을 가볍게 정리하고 즐겁게 이겨내면서 나를 영향받게 할 정도였다

 

 

 

난 사실, 항상 그녀가 좋았지만 내가 그녀에게 영향받는 일은 없었는데 이곳에서의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그녀는 반짝거리고 에너지와 여유가 점점 넘쳐흘렀고 가만히 있는 내가 오히려 무채색의 인간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잔뜩 건조하고 푸석한 납작한 탈지면 같던 형체가 얇고 가볍게 바람을 따라서 날아오르더니 솜사탕처럼 부풀고 환하게 반짝거리더니 달달해져버렸다

 

그녀는 아직도 사람들이 왜 여행을 가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할까

 

탈지면같던 사람이 솜사탕이 돼서 내 옆에서 종알거리는데

언제나 포커페이스라고 자부하던 탈지면이 내심 항상 귀여웠던 것이

포근하고 푹신한 형체만 비슷하지 나는 부풀어 오른 그녀가 이렇게 반가운 것이

그녀가 이럴 줄 내 심 알고 있었나 보다

 

 

 

언덕을 걸을 때 즈음이면 이미 뇌경색을 두 번이나 겪은 내 아버지 걸음만큼이나 버거운 몸상태로 신체활동이 버거워지는 그녀가 부디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오래 내 친구로 남아주길 바라지만, 우연이 사귀게 된 성인이 되고 나서 만난 친구에게 굳이 건강을 신경 써라 운동해라 미주알고주알 노파심에 늘어놓게 되는 불필요한 간섭과 잔소리를 하게 되는 것이 두려워서

부디 아프지 말고 앞으로도 건강하게 오래 보고 싶다는 생각들을 걸리지 않기 위해서 조심한다

 

나는 그녀가 조금 더 많은 것들을 과감하게 누리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주어진 환경 안에서 타협하고 만족하고 살아가는 대신에, 생각보다 많지 않은 시간과 기회를 매 순간 영리하게 알아차리고 악착같이 차지해서 조금 더 이기적으로 자신이 웃기 위해 사는 날이 많기를 바랐다

 

 

 

그녀가 오고 싶었던 곳에 도착했다

 

비 온 뒤 웅덩이에 고인 물에 툭툭이 흔들거릴 때도 우린 좋다고 신이 나서 깔깔거렸다

높은 언덕에서 승객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타다 내려 걷기를 두 번이나 반복하고도 입이 찢어져라 웃고 낄낄거렸다

 

사치하지 않고 낭비하지 않는 그녀와 함께 있으면서, 먹지도 않을 이름에 혹한 케이크를 시켜놓고 여유를 부린다

내일 즈음엔 그녀에게 맞는 슬리퍼를 하나 사야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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