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랄랄라라라 필리핀 배낭여행 ]
THE GIRL, COMES FROM FAIRY TALE
갈빗대로 만든 풍경
그가 내준 갈빗대 앞에 서서
가끔, 박동이 약해진 일상을 거창한 사건이 소생시켜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곳저곳을 뒤질 때가 있다
철저하게 계획에 의한 움직임만 가능한 사람이 '우연'을 기대하는것은 역시 어렵지만, 뇌에 새로운 정보를 집어넣는다는 것으로도 인간은 기대하고 기다린다
그리고 사소하지만 결국 도달하면, 사소하게나마 보상이 주어지는 것때문에 여행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빛나는 보상 없이 한 가지 일에 오랜 시간 열정을 쏟는 많은 사람들 만큼 지구력이 부족한 나는,
하루에도 여러번 스스로의 약한 마음을 꾸짖고 의기소침해지고 좌절하면서 타인이 5년 뒤, 10년 뒤를 계획할 동안 하루를 버텨내기에도 급급하고 버겁다
아무런 보상 없이 묵묵히 10년, 아니 평생을 쏟아내는 사람들의 힘은 무엇일까
실망하지 않고 자책하지 않고 불필요한 감정을 배제하고 올바른 지성과 이성만으로 가능하다면 차라리 빠져나가기 쉽고 포기하기 편할 수도 있겠다
살다 보면 내 옆에 있던 소중했던 가족과 친근했던 사람이 돌연 낯선 공격자로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사소하게든, 짧게든 그런 순간은 익숙하고 내게 가장 편했던 주변환경으로서의 공간이 파괴된다
내게 가장 익숙한 공간을 떠나서 낮선 곳에서 체류하고 살아본다는 것은
돌아갈 보금자리가 있는 이들이 누리는 특권이자 짜릿한 일탈이다
하지만 내가 머무는 곳에서의 잦은 순간들이 안정되지 못하고 여러 종류의 파편들이 불쑥 솟아오르거나 날아들 때, 보금자리가 아니고 뿌리를 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여유나 낭만보다 먹고 살 걱정을 안고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보내는 것에서 잠시 이탈하는 것조차 쉽지 않고, 잠시 시선을 돌리는 일조차 버겁고 쉽지 않은 결정이 된다
나를 이루고 있는 형태는, 모든 조각과 파편을 합한 값이다
그 조각의 출처를 좋은것으로 집어넣고 밝은 색으로 기억하는 것이 나의 몫이고 선택이다
내가 이런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묵묵히 같이 걷는 나의 동반자는 조각을 신중하게 골라낼 만큼의 여유를 나에게 빼앗긴 것일까, 본인의 선택이었을까
나는 언제나 미안한 마음과 빚진 기분을 안고 좋은 풍경 앞에 서서 그를 떠올린다
언젠가 나를 이루고 있는 모든 조각의 출처를 어떤 마음으로 건 차분히 늘어놓고 바라보고 싶은 날이 올 때 밝은 조각이 많기를, 그리고 모든 조각이 어떤 명도이건 소중하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