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에 직장을 나와 사업을 시작한 뒤 10년도 되지않아 업계 1위를 고수하고 있는 홍보대행사 프레인의 여준영 대표... 좋은 집안과 좋은 직장 출신일 거라는 어렴풋한 나의 생각을 여지없이 깨준 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그의 20대 인생입니다.
인생은 후불제라고 고생하고 투자한 것은 후에 반드시 보상받는다는 말이 이 시대를 살아가며 비애를 느끼는 우리에게 자그마한 희망을 줍니다.
여대표 님이 말한 것처럼 나 역시 20대에 만난 사람과 결혼하고 20대에 시작한 일을 하며 20대에 만난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비가 내려서일까요? 차분한 그의 글이 더욱 마음에 와 닿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조언을 주어서... 그리고 희망을 안게 해주어서... 많은 분들과 공유하고자 여준영 대표의 인터뷰를 스크랩해 올립니다.
인생에 있어 신분이 변화하는 계기 혹은 사건은 대부분 20대에 몰려있다.
나 역시 20대, 그 짧은 10년을 소년에서 청년으로, 어른으로. 학생에서 군인으로 회사원으로 또 한 가정의 가장으로 정신없이 변신하며 살았다. 나는 스물 다섯에 만난 여자와 결혼을 했고 스물 여섯에 택한 직업
에 여태 종사하고 있다. 스무살의 선택으로 평생을 살게 되버린 거다. 이십대의 선택은 그래서 중요하다. 대학시절 두번의 연애를 각각 6년씩 했다. 첫번째 여자는 군복무시절 다른곳으로 시집가버렸고 두번째
만난 여자가 지금의 아내다.
20대의 전반부는 새털처럼 가벼웠고 후반부는 콘크리트처럼 무겁고 단단했다. 누구나처럼 입시 터널을
통과한 자의 자유를 만끽하며 20대를 출발했다. 당시 시대상황상 대학생의 30%는 소위 운동권 – 가담
(?)의 정도엔 차이가 있지만 - 이었고
30%는 공부벌레였고, 마지막 30% 는 당시 처음 나온 용어인 오렌지 족, 혹은 오렌지 족이 되고 싶은
사람들 이었다.
나는 어느쪽에도 포함되지 않은 아웃사이더 였다. 현실의 부조리에 대항하거나, 미래에 대한 대비를 하기 보다는
그저 주어진 자유를 누리며 가볍게 산 편이었다. 집안에 큰 시련이 있던 탓에 학비를 직접 벌어야 했지만 강남에서 족집게 과외 선생으로 소문이 난 바람에 비교적 쉽게 학비를 조달할 수 있었다.
졸업사진. 당시엔 어학연수라는 문화는 없었고 배낭여행도 한 과에 한두명 정도만 경험할 정도였다
학문 ?
수학을 못해 문과를 택했는데 "‘콤퓨타’가 모든 집에 깔리는 시기가 10년안에 올것" 이라는 소신으로 응용통계학을 전공한 덕분에 4년 내내 수학 시험을 봐야했다.. (난 내가 살면서 시험에서 빵점을 맞게 될지는 상상도 못했다) 덕분에 공부를 잘 하지 못했다.
“군대 갔다 오면 사람된다 “는 말은 내게도 딱 들어 맞는 말이었다. 아니 사실 정확히 말하면 군대가 사람을 만들기 보다는
제대후 처음으로 부딪히게 되는 “현실” – 가장 큰 현실은 먹고 사는 것 이고, 군대는 우리 생에 마지막으
로 먹여주고 재워주는 집단이니까 - 이 사람을 만들었다는 편이 옳을 것 같다.
군대에서는 포병 -군악대-공관병 등의 보직을 거쳤다. 군악대 시절 사진 / 맨뒷줄 좌측에서 네번째가 필자.
지금도 가끔 동창들을 만나면 “우리가 10년 늦게 태어났으면 취직도 못했을 것” 이라고 고백(?)할 정도로 당시엔 “취업난”이란 말 자체가 없었다. “가고 싶은곳”을 가느냐 “갈수 있는 곳”을 택하느냐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 웬만하면 취업은 다 했다. 공부 못한 내게도 “갈수 있는 곳”은 있었다.
첫직장인 코오롱 그룹 신입사원 연수 중 동기들과. 우측 앞열에 턱괴고 있는 사람이 필자
첫직장인 코오롱에서
내가 처음 받은 월급은 70만원 정도 였다. 매년 오르는 액수래봐야 고작 3-40만원 정도 였는데 그나마 IM
F 여파로 연봉이 오르긴 커녕 깎이는 바람에 퇴직할 당시, 서른이 된 내 월급은 여전히 초봉 수준이었다.
공부 잘해서 금융권에 취직한 친구들 중엔 연봉이 내 세배인 경우도 있었으니 학교든, 군대든 늘 남과 같
은 조건 하에 놓여있다가 처음으로 세상의 불공평함(unfair)을 실감한 시기였다. 그리고 그 불공평함의 수혜
자가 되느냐 피해자가 되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본인 자신이라는 걸 깨달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1/3 수준의
연봉은 대학시절 내 삶이 받은 성적표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입사후 1년이 지나자 104명의 입사동기가 하나 둘 퇴사하기 시작했는데 내 눈에만 그렇게 비친건지는
몰라도 직장을 박차고 나가는 순서가 집안이 좋거나 능력이 뛰어난 순 이었던 것 같다. 소위 말해 대안을 가지
고 있는 동료들은 선택이 자유로왔던 거다.
당시 나는 서울 가장 싼 곳에 반지하 월세 방한칸 얻어 혼자 먹고 자던 처지였다. 회사를 그만두면 당장 하
루도 먹고 살 방법이 없는 나로서는 그저 소처럼 일하는 방법 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구체적인 목표
가 없던건 아니었으나 그 접근법은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이회사 사장이 되려면 내 동기 100명 내 아래위 동
기 각각 100명 총 300명중에서 일등하면 되는 것.” 이란 생각만 품고 살았다. 단 하루 휴가도 쓰지 않고 주말
도 없이 새벽에 출근해 밤 11시에 퇴근하는 생활이 5년간 이어졌고 그러다 보니 300명중에 1등은 아니어도 적
어도 동기 중에 가장 진급이 빠른 상태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십대를 마감하던 해 사표를 내고 사업을 시
작했다. 사업 밑천은 이십대의 반을 털어 배운 일. 그게 다였다.
일본(좌) 밀라노(우) 출장중 사진. 내 해외 여행경험의 90%는 코오롱 시절의 출장이었다. 금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요즘 젊은층 처럼 해외여행을 자유롭게 다니지 못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출장을 자주갈수
있었던 건 큰 행운이었다.
나는 인생은 후불제라고 생각한다.
하루 15시간 일하고 70만원의 월급을 받으며 20대를 보냈는데 지금은 그 보다 훨씬 적게 일하면서 수십배의 돈을 벌고 있다. 그 이유가 내 실력이 그 시절에 비해 수십배 향상된 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
때 받을 보상을 지금 후불로 받고 있다는 생각이다.
피카소는 단 몇분만에 초상화 한장 그려주고 엄청난 돈을 받으며 “그림 그리는데는 몇분 안걸렸지만 이렇게 받는데 몇십년 걸렸다”고 했다. 대기업의 중역과 말단 직원의 연봉은 수백배 차이가 나지만 그렇다고 해
서 그 중역이 연봉차이 만큼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며 연봉차이의 시간만큼 더 일하는 건 더더욱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열심히 산 모든 이는 이십대에 유보되었던 보상을 언젠가 후불로 받게 되며 그 액수와 시기가 조금씩 다
를 뿐이라는 생각이다. 인생은 후불제고 얼마를 받느냐를 결정하는 시기가 바로 이십대다. 바꿔 말하면 인생을 즐기기 위해 선불을 지불하는 시기가 바로 찬란한 이십대다. 그런 이유로 이십대에 하는 모든 일들중 쓸
모 없는 일이란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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